■ 황보순자 아이 넷을 키우고 이천YMCA아가야 부모협동어린이집 준비위원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고, 살구나무와 감나무, 찔레꽃과 진달래가 피던 계곡에서 친구들과 가재잡고 도랑 치던 곳이었다.

김장철에는 집집마다 배추가 담벼락에 그득히 쌓여 동네 아주머니들이 며칠을 집집이 돌아가며 김장을 함께 담그셨다. 그러면 우리들은 골목길에서 놀다가 밥 때가 되면 벌겋게 갓 무친 김장배추를 죽죽 찢어 밥 한 그릇 뚝딱 먹고도 그 매운 김치를 배가 아플 때까지 먹곤 했었다.

가까운 동네에는 외할머니 댁이 있어 자주 들르곤 했는데 외할머니는 약과와 약밥도 만들어 주시고, 집에서 직접 두부도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중 특별히 맛이 좋았던 것은 큰 홍두깨로 밀어서 석유곤로에다 끓여주신 손칼국수가 지금도 가끔 먹고 싶어질 정도로 맛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동네에서 보살핌을 받고 배우며 자라왔다.

지금은 아이가 넷인 탓에 친정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 친정엄마가 튼실한 외손주 2년 동안 업어 키워주신 탓에 무릎관절이 많이 심해지셔서 예상보다 일찍 아이를 데리고 출근을 하고 있다.

오후엔 시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집으로 보내고 있다. 위로 큰애들 셋은 여자애들이라 그런지 목소리 크고 입담이 짓궂은(?)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곤 했는데 막내아들은 할아버지를 참 잘 따른다. 기다리던 아들 손주라 그런지 할아버지도 엄청 좋아하시며 집에까지 데려다 주는 일을 참 즐거워하시는 것 같다. 하루 부탁드렸었는데 계속 데리러 오신다. 또 데리러 오시면 아이들이 우르르 나가 ‘대현이 할아버지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하고 반겨주니 할아버지는 ‘애들이 나만 가면 좋아서 우르르 나와 인사들을 하네요~’하고 할머니께 자랑스럽게 전하신다. 아가야에 친구를 데리러 오시는 할아버지로는 두 번째이신데 유일하시다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아가야에는 아이를 데리러 오는 아빠들도 많다. 교사가 모두 여자들인 탓에 아빠들이 오시면 교사들이 하기엔 좀 어려운 일들을 부탁하곤 하는데 아이들은 또 그 옆에서 어떤 때보다도 더 신나해 한다. 또 어떤 날은 간식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오신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간식을 나눠먹고 아이들의 재주들(옆 돌기, 물구나무서기 등)을 즐겁게 봐주시며 책도 함께 읽어 주고 가시곤 한다.

절기상 입동이 지났다. 추수한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야 하는 절기인데 작년에 담근 간장과 된장이 아직 남아있어 올해엔 친구들과 고추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막막해 아가야가 있는 관고동에 살고 계시고 베이비시터 활동을 하셨던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은 대나무채와 얼개미, 보리 싹 틔운 엿기름과 큰 솥이며 주걱들을 들고 오셨다. 고추장 만들기는 아이들과 함께 전 과정을 하다 보니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다. 아니다. 건 고추 닦고 말리고 방앗간 가서 가루로 빻아오고 하는 것까지 따지면 2주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고추장 담그는 방법은 어렵지 않지만, 큰 그릇들을 사용해야 하며 엿기름물을 오랜 시간 달여야 하는 등 그 과정이 참 길고 귀찮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담근 고추장 맛은 참으로 일품이었다. 우리가 직접 담근 매실효소까지 더해져 고추장이 익은 그 맛이 어떨지 정말 기대된다. 아이들에게 우리의 세시절기 활동을 경험케 해 주려고 했던 것이 어른인 선생님들도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동네 어른한테 배우는 그야말로 배움의 공동체인 것이다.

변산반도에 계시는 윤구병 선생님께서는 ‘교육이란 별게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보살피는 일, 제 손발 놀리고 제 몸 놀려 먹고, 입고, 자는 나날의 삶을 알차게 꾸려가는 길을 열어주는 일. 사람 새끼는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이웃과 함께 서로 도와가면서 오순도순 살 수 있게 너른 마당을 마련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둘러주는 일. 나아가 모든 목숨 지닌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삶을 잔치로 바꾸는 놀음을 거드는 것이 교육이 맡은 일이고, 교육자가 할 일이다‘라고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에 쓰셨다.

우리 아이들이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 어릴 적 YMCA아가야에서 친구들과 부모님들과 동네어른들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큰 힘이 되어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