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익 재경이천시민회 회장

태풍 ‘할롱’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입추(立秋)가 지나니 더위가 조금은 주춤한 듯하다. 그래도 한낮의 폭염은 쉽사리 물러갈 태세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염천(炎天)의 날씨가 지속되리라는 기상대의 예측이다.

따가운 햇살이 농작물에겐 알곡을 여물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무더위와 씨름하는 우리에게는 심신을 괴롭게 하는 훼방꾼이다.

예전엔 벼가 한창 익어 가는 입추 무렵에 비가 계속되면 날이 들기를 비는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는데 요즘 같아서는 기우제라도 올려 시원한 소나기라도 한줄기 불러 봤으면 좋겠다.

옛 선비들은 복중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시원한 계곡에 모여 한담을 나누며 시를 짓는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한다. 물론, ‘글을 통해 인격을 닦는다.’는 모임의 취지를 잃지 않으면서 원기를 북돋아 무더위를 물리치는 음식도 먹고, 탁족도 즐기면서 말이다. 아마 한적한 곳에서는 알몸으로 선탠을 하는 거풍(擧風)도 시도했을 것이다.

더위를 받아들여 자연 속으로 들어가 건강도 챙기고, 풍류도 즐겼으니 이 보다 더 좋은 여름나기가 어디 있을까 싶다.

우리도 예전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마을 앞 저수지나 시냇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종일 동무들과 같이 멱 감고 노는 게 일이었다. 물놀이에 지치면 가재나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었는데,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가끔은 체나 족대그물로 천렵(川獵)도 했다. 맨발로 개울가를 뛰어 다니다 깨진 유리조각에 발을 베어 몇 날을 고생한 적도 있지만, 팔딱팔딱 뛰는 피라미와 붕어를 잡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맘 때면 영글기 시작하는 풋콩을 꺾어다 콩서리도 즐겼다. 콩깍지에 아직 까칠까칠한 솜털이 돋아나 있었지만, 가지째 꺾어다 통째로 구워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배고팠던 시절이라 먹는 것만 기억에 남았나 보다. 저녁이 되면 펌프로 길어 올린 물로 등목을 하고, 마당가 평상에 둘러 앉아 샘물에 담가 놓았던 수박을 갈라 먹었고 마침, 피워놓은 모깃불에 감자나 옥수수를 구워먹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밤이 이슥할 즈음, 마실 오신 어르신께서 풀어놓는 귀신이나 도깨비불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한 사내가 길을 가다 산중 오두막에서 도깨비불을 만나 밤새 싸우다 붙잡아 기둥에 묶어 놓았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몽당 빗자루였다’는 얘기는 어린 시절 얼마나 무서웠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농사일에 바쁜 어른들은 따로 날을 잡아 더위를 피했는데, 집에서 기르던 누렁이 한 마리를 끌고 솥단지에 갖은 양념을 준비해 동네 계곡으로 몰려갔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그날 이후로 누렁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열치열로 더위를 다스린다고 개장국을 끓여 영양을 보충했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골짜기 시냇물에 발을 담가 놓고 탁족을 즐겼던 것이다. 몇몇은 발가벗고 시원한 계곡물에 뛰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상전문가들은 이상 기후로 인해 앞으로 20년 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열대 지역은 유례없이 뜨거운 여름을 맞게 될 것이라며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넣고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 변해가는 기후에 순응하면서 슬기롭게 더위를 이겨낼 일이다. 뭐니 뭐니 해도 적당한 운동과 영양보충으로 더위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이천저널  icjn258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