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진 윤흥길의 ‘완장(腕章)’은 권력에 중독된 인간의 물욕과 과시욕을 실감나게 그려낸 작품이다.

어쩌다 땅 투기로 떼돈을 번 졸부의 눈에 들어 저수지를 돌보는 ‘감시원’ 완장을 얻어 차고 거들먹거리는 주인공과 그를 손가락질해대는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희화화된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설이 발표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완장’에 목매다는 사회 풍경은 여전하다는 느낌이며 한 세대가 지나도록 사회의 모습이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 몹시 씁쓸하기도 하다.

완장은 본래 사회 공익질서 유지를 위한 희생, 봉사의 표식이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이 심화되고 인간의 탐욕이 깊어지면서 이것이 어느새 권력자 또는 그 권력의 하수인들에 의해 ‘사람 잡는 무기’로 둔갑 변질된 것이다. 그래서 이 완장의 꿀맛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약과도 같은 심한 중독현상까지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백인 노예상인을 도와 노예사냥에 앞장선 것은 완장 찬 흑인들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국가들에서는 나치 완장을 두른 부역자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에도 헌병보조원, 순사보조원으로 독립군을 탄압하고 양민들을 괴롭힌 것도 바로 이 완장 걸친 우리의 동포 조선인들이었다. 6·25 전쟁 통에는 괴뢰군의 붉은 완장 찬 머슴들이 주인 가족을 처형했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완장 두른 보도연맹원들이 좌익 인사들을 몽둥이로 쥐 잡듯 때려잡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완장은 무상한 권력에 기생하는 인간의 순응주의를 상징한다. 그래서 반드시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해악으로 지탄 받아 왔다. 그런데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참여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완장문화의 폐단은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모른다.

우리사회가 정의나 이성을 좇기보다 힘과 변칙에 따라 수시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창한 완장 가운데 하나를 꿰어 찼던 나폴레옹은 “인간은 지위로 평가 받는다”고 했다. 그의 잣대로 본다면 조선시대 대학자인 남명 조식선생은 존경받지 못할 인물이다. 그는 살아생전 벼슬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44세 때 ‘당성현감’을 제수 받은 남명 조식은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바로 사직서를 올려 당시 집권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비(문정황후)는 비록 신실(信實)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낱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일 뿐입니다.”

이에 문정황후가 펄펄 뛰고 어린 명종까지 분통을 터트리니 그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격이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퇴계 이황은 “남명이야 말로 다시 없는 고항지사(高抗之士)로써 풍진(風塵)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진정한 의인”이라며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요즘 세상이 하도 어수선 하다 보니 감투나 완장에 눈이 멀어 눈치 보기, 편 가르기, 줄 대기 하느라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남명의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는 더욱 그 울림이 크고 깊게 다가온다.

“이 보소 사람들아 이내 말 좀 들어보소, 남아는 큰 길을 어디 두고 왜 자꾸 사로(斜路)로 간단 말이오?”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근세에까지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려왔던 대한민국의 대외적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을 모시고 나선 첫 해외순방에서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짓을 저질렀으니 국내외적 망신을 사는 게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정권을 잡은 덕에 얼떨결에 권부에 입성한 인사들의 ‘완장의식’을 거론하며 자중과 진중함을 권고하기도 했다.

평범하던 사람들도 어쩌다 완장하나 걸치게 되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호가호위를 일삼으며 위아래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전락해 가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로 우리사회에 만연된 완장문화에 익숙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공익과 사회발전에 이바지 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차제에 이런 완장문화의 폐단이 또 없는지 차분하고 냉철하게 돌아보고 점검 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