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수당 월9만4천원이 전부, 달세(月貰)는 15만원”
온 세상이 “까치까치 설날”을 맞이하려고 분주한 설 전야,
‘설레는 설’에 찾아온 불청객 올 들어 가장 춥다는 한파경보
추위로 ‘흔들리며’ 맞이하는 쪽 방 어르신의 ‘서러운 설’

이천 관고동 중앙목욕탕 뒤편 2평 남짓 쪽 방, 차디찬 방에 앉아, 설 풍속을 전하는 설레는 목소리로 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전하는 TV속 예쁜 아나운서를 ‘흔들며’ 바라보는 할아버지…,

화면에는 친인척들이 모여 전을 부치고, 부모님께 드릴 선물 사느라 분주한 모습, 부모님을 찾는 귀향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설’의 유래를 찾아보면 60년대 어려운 시절 속절없이 다가오는 새해에 준비할 제사준비, 설빔, 아랫사람들에게 줘야 하는 세뱃돈… 없던 시절에 새해가 다가오는 것이 서러워 ‘설’이라고 했다는 說 이 있다.

할아버지, ‘설레는 설’이 아닌 ‘서러운 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작은 브라운관 티브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0식(83) 할아버지, 앞에 놓인 작은 상에는 누군가 갖다 준 ‘불고기 전골’이 담긴 냄비(설익어 바닥은 타고 겉은 벌건 핏물이…)와 며칠이 지나 말라붙은 고등어 조림 그릇, 티브이 옆에 놓인 전기 밥솟 (열어보니 밥솟 뚜껑에 곰팡이가 가득…)

부엌엔 휴대용 가스렌지, 고장 난 미니 냉장고 하나, 방문이 잘 닫히지 않아 못된 추위는 사정없이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밤8시쯤 누군가 “할아버지 계세요?”라고 부르며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무심해 보이던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누가 왔어요! 할아버지(필자가 말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그 사람뿐이 없어. 양복점집 아줌마”
(미조사 양복점을 지칭, 이천 순복음 교회 이효분 권사였다.)

“누진세 무서워 전기장판조차 못쓰고, 2개월이나 밀린 달세”
들어오자마자 방바닥을 만져본 이씨는 “방바닥이 왜 이렇게 차가워 할아버지!” 깜짝 놀라며 급히 담요를 꺼내 바닥에 편다.

“전기난로 어디 갔어요? 전에 갖다 드렸잖아요. 아유 이거 봐! 추워서 떨고 계시면서” 할아버지는 ‘흔들고’ 계신 것이 아니라 추워서 “흔들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전기세 땜에 사용 못해”
할아버지는 보증금 없이 방1칸에 달세15만원을 내며 살고 있었다. (전기세는 주인이 부담하는 월세 형태)
“지난달에도 전기세가 8만원이나 나왔어, 방 주인은 뭘 갖고 살어”
(얼마 전 누진세 때문에 집주인이 전기요금폭탄을 맞았다.)

-설날인데 자녀들은 오지 않나요?”(잠시 추위에도 안절부절 못하던 필자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속 모를 미소를 짓다가 대답했다.) 자식얼굴 (아들2, 딸2) 못 본지 20년도 넘었어. 옛날 빌라(신둔 명지빌라) 팔았을 때 돈 다 훔쳐간 뒤론 안 와, 저 액자 속에 있는 것들이 자식들이여”
아버지는 그 자식들이 존재한다는 (법적인) 이유로 생활보호대상자에도 누락되어 있었다.

노인수당 9만4천원이 수입의 전부. 날씨 좋을 땐 공공근로를 하면 시에서 20만원을 주었었는데 할아버지는 봄 이 되어 일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평소 자주 드나들며 챙겨주던 이효분씨가 어떻게 집세를 내느냐고 걱정하며 물을 때 마다 “친구들이 조금씩 집세 내라고 줘서 내고 있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필자가 몰래 집주인에게 확인하니 두 달치나 밀렸단다.

-할아버지 두 달치나 밀리셨는데 왜 다 냈다고 하셨어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지금 입고 있는 옷, 이불, 가스레인지, 부탄가스, 반찬…이 사람이 갖다 주고 있어, 나 말고도 돌보는 노인들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떻게 월세 이야길 해”

“젊은 시절 조손 가정 아이 학비 대주고 과외지도 해주던 따뜻한 분”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려고 할아버지가 말을 바꿨다.

“나 이래 봐도 성신고 나왔어!” (생각은 안 났지만 할아버님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아! 그 유명한 성신고요!” “그래 그 성신고, 공부 잘했지. 예전에는 모가에 공부할 수 없는 가난한 애들이 많았어. 그 애들 가르치는 거를 좋아했지”

할아버지는 이천 모가면 신갈리에서 젊은 시절(16년간) 교회 전도사로 지냈었다. 그때 그는 어려운 이웃들을 섬겼던 사람이었다. 가난해 중학교도 그만둬야 할 동네아이(할머니와 둘이 사는 조손 가정)에게 학비를 내주기도 했고 몇몇 가난한 아이들 무료 과외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홀로 계신 독거노인들을 모시고(모가에는 병원이 없어) 이천 시내 병원에도 많이 다녔던 따뜻한 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외로운 독거노인이 되어있었다.

밝아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 보고 싶어서 선행 이야기 좀 더해달라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다 지난 일이야, 좋은 일 하면 뭐해, 다 쓸 때 없는 짓이야! 날 봐”

“자식은 예뻐만 하면 안돼, 잘못할 땐 매를 들었어야 하는데…”

-어르신 젊으셨을 때 자녀들에게 무섭게 하지는 않으셨어요?
“아녀, 난 애들에게 손 한번 댄 적이 없어. 하나 아쉬웠던 건 자식은 너무 예뻐만 하면 안되, 잘못할 땐 매를 들었어야 하는데…”(그리곤 말문을 닫으셨다.)

내가 왜 이런 처지가 됐는지 알아?

난 할멈을 2명이나 하늘로 보낸 사람이여, 죄가 많지”(한 분은 19년 전 차 사고로, 또한분은 병환으로 5년 전에 하늘로…)

-어르신! 남천공원 옆 노숙자들을 무료로 돌봐 주는 시설이 있는데 추위 때 잠시라도 가 계시다가 돌아오시면 어때요?

“갈수가 없어, 내가 수전증이 있어서 밥을 먹다가 많이 흘려. 여럿이 사는 곳에 가면 다른 분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될 까봐…”

-옷 세탁은 어떻게 하세요? 이불 빨래는요? (방에 가득한 퀘퀘한 냄새가 나서 물었다.
“옷은 그냥 입다가 버려, 이불은 한번 빨긴 해야 되는데…”

-세탁소에서 무료로 세탁해드리면 갖다 주시겠어요?
“미안하게 어떻게 갖다 줘”

-집에 세탁기가 있으시면 돌리실 수는 있으세요?
“그 정도는 할 줄 알지, 단추만 누르면 되잖아, 근데 걱정마”

-할아버지 이 추운데 화장실이 안보여요.
“요 위로 조금 올라가면 공원 화장실 이용하면 돼, 잘해놨어”
“근데 여기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어여 가봐.”(추워서 떨고 있는 필자가 안쓰러워…))
할아버지는 마치 문안 왔던 자식대하듯 문밖에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었다. 한참동안… 

이천저널  icjn@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