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고향’과 ‘농촌’을 주제로 전 홍콩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천쌀 출시기념 제1회 홍콩한인 글짓기대회’의 결과가 지난 11일 발표됐다. 성인부와 학생부로 나뉘어 진행된 이번 대회에는 서정적인 풍경과 구수한 시골 내음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선정됐다. 한국의 정서가 물씬 묻어나는 ‘이천쌀 출시기념 제1회 홍콩한인글짓기대회’의 수상작을 만나봤다. 

“박 이사님, 한국에서 전화 왔습니다. 연결할까요?”
“나 지금 바쁘니까 메세지 받아주세요.”
“김명석 변호사라는데요?”
“그런 이름 들어본적 없는데…하여튼 연결해 봐요.”

한참 후에 통화를 마친 대니얼 박은 빅토리아 하버가 내려다보이는 홍콩 IFC의 79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하필이면 왜 이때 귀찮게시리…”

뉴욕 월스트리트에서도 제일 큰손이라 불리는 IMG의 파트너로 있던 대니얼은 3년전 전세계 금융시장 폭락 때 억울하게 책임을 뒤집어쓰고 쫓겨나듯이 홍콩 사무실로 내몰려온 후, 뉴욕으로의 복귀를 위해 정말 혼신을 다해 일했고 모든 것을 희생했다. 3년간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일만 하는 그를 가족은 이해할 수 없었고, 아내와의 이혼소송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띠릭”

아이폰을 열어보니, 중학생 1학년인 딸 그레이스가 일주일 후의 자기 생일 잊지 말라고 자기 사진을 첨부한 메세지를 보내왔다. 대니얼은 잠시 가슴이 저려왔지만, 자기를 비참하게 홍콩으로 내몬 본사의 패트릭과 크리스를 향한 분노로 다시 눈이 이글거렸다. 다음 주에 있을 뉴욕에서의 파트너 재선출 투표에서 반드시 승리해서 패트릭과 크리스를 바닥까지 몰아내버리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있는 씹어 먹는 위산억제제를 습관대로 입안에 털어 넣으며 딸의 웃는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를 삭제해버렸다.

일주일뒤 대니얼은 뉴욕행 케세이퍼시픽 항공 380편 일등석에 앉아 뉴욕에서 있을 회의 내용을 다시 점검했다. 3년간 자신의 홍콩에서의 실적과 아시아 시장 분석을 통해 IMG뉴욕 본사가 입은 막대한 수익 분석 자료를 볼 때 이번에 뉴욕본사 파트너 재등극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건 패트릭과 크리스의 불법 정보유출 증거를 공개하여 그들을 완전히 망가뜨려놓는 것이었다. 그때 조종석으로 여사무장이 황급히 들어가더니 잠시 후 상기된 표정으로 나왔다.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captain speaking…승객여러분 기장입니다. 우리 비행기에 예상치 못한 자동순항장치의 이상으로 항로를 이탈해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비행과 착륙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앞으로 14시간여의 비행을 자동순항장치 없이 하는 것은 안전상의 문제가 되므로 지금 위치에서 자동순항 장치를 수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인 한국의 인천공항에 잠시 착륙하여 가장 신속하게 시스템을 정비하여 재출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필이면 이런일이…” 비행기가 인천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하자마자 대니얼은 미국 본사 비서실장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Hey Chris, this is Daniel from Hong Kong office…크리스, 나 홍콩 사무실의 대니얼인데. 문제가 생겼어.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서 회의에 늦을지도 모르겠어. 원래 아침 6시 반 도착이어서 8시까지는 사무실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게 언제나 고쳐질려나 모르겠네…어쩌지?”

“대니얼, 요즘 비행기 고장이 유행인가봐? 인도 사무실의 비슈도 비행기 고장으로 제 시간에 못 온다고 방금 전화 왔는데. 런던 사무실 앤디는 수술 후유증으로 화상 통화로 하기로 했고…좀 기다려봐 내가 리차드하고 고든하고 상의해보고 연락해줄게.”

재정비가 길어질 것 같다며 굽신굽신 사과하는 기장과 사무장을 뒤로한 채 대니얼은 비행기를 내려 공항내의 일등석 라운지에 들어갔다. 발렌타인 17년산을 얼음이 든 잔에 받아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아이폰이 울렸다.

“대니얼 나 크리스인데, 회의 일주일 연기하기로 했어. 다음 주 수요일 같은 시간에. 다음 주에는 하루 전에는 도착하도록 해.”

발렌타인 17년산이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흘러가는 것이 불붙은 벌레가 지나가듯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라운지에서 잠이라도 자고 싶을 만큼 피곤했지만 나른함을 가까스로 물리치고 라운지를 나와 공항 근처의 하얏트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 그대로 침대로 고꾸라졌다.

“띠릭 띠릭”
몇 시간이 지났는지 머리가 터질듯한 아픔에 신음하며 아이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지난주에 전화 드렸던 김명석 변호삽니다. 혹시 결정하셨습니까?
“어…일단 직접보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제가 지금 한국에 잠시 와있는데 내일 그곳으로 한번 가겠습니다. 내려가면서 전화 드리죠.”

전라도 소양. 대니얼이 태어난 곳. 하지만 그가 8살 때 그의 부모는 농사가 싫어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고, 부모에게 떠밀려 13살 때 미국의 먼 친척집에 유학을 간 이후론 지난 32년 동안 기억에서 거의 지웠던 곳이다. 미국에 도착해 6개월 후에 부모가 아파서 오랫동안 못 보러 온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친척 부부가 방에서 하는 얘기를 엿듣고 자신의 부모가 둘다 차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 대니얼은 부모에 대한 분노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후로 할아버지에게 연락이 한 두 번 온 것 같은데, 대니얼이 시카고대학 기숙사로 이사를 가면서 한국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었다. 자기 부모와 관련된 사람들과는 연관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대니얼 앞으로 35억 상당의 산과 밭을 유산으로 남기고 죽었다는 것이다.

“참…이런 귀찮은 일이…” 일 년 수입이 그 두 배쯤 되는 대니얼에게는 당장 돈이 될지도 모르는 산과 밭은 귀찮게 여겨졌던 것이다. 대니얼이 탄 차가 전주시내에 들어오자마자 외곽도로를 타고 소양으로 빠졌다.
“매앰 매앰 매앰…”

차에서 내리자 매미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내리친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명석 변호사라고 합니다.”
키가 농구선수만큼이나 큰 안경 쓴 사내가 손을 내민다.

“네…서류주시면 제가 서명할 테니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팔아주시고, 그냥 경매에 넘기셔도 되고, 변호사님께서 받으실 수임료 제하시고, 제 비서가 은행구좌 보내 드릴테니 그리로 넣어주세요.”
“네? 아직 보시지도 않았잖아요. 그리고 아직 밭과 과수원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고, 고모 할머님께서 집에서 아직 살고 계세요”
“보나마나 이 시골 땅을 갖고 있어야 뭐하겠어요. 그렇다면 팔아서 일하시는 분들 일년치 보수 드리고 고모할머니는 적당한 곳에 살 곳을 얻어드리세요. 뭐 얼마나 오래 사시겠어요?”

그때 삐익하고 대문이 열리고 머리가 흰색반 검은색반인 허리가 거의 90도로 굽다시피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온다.

“팔긴 뭘 팔아…나 죽이고 팔아라 이눔아…”
“아니 이 할머니가 왜 그래?”

대니얼이 팔을 잡고 늘어지는 할머니를 밀쳐내는 순간, “어억…” 모든 게 하얘졌다.

“어…당신이 여기 웬 일이야? 그리고 여기 어디야? 어…그레이스도 왔구나? 근데 너 왜 우니?”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에 대니얼은 어리둥절했다.

“영양실조와 위출혈로 의식을 잃으셨었습니다. 전북대 부속병원으로 모셨습니다” 김명석 변호사가 말했다.
“어…지금 몇 일이에요? 나 화요일에는 뉴욕 가는 비행기 타야하는데…”
“당신…지금 상태가 어떤지나 알고 그러는 거에요? 내가 진작에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어야 하는 건데…내가 이제 장례를 치루게 생겼으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당신…장례라니?”
“이틀간 의식을 잃으셨던 동안 조직검사와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위암4기에 암세포가 많이 퍼져서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김명석 변호사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여기 시골병원이라서 오진한 거야!”
“조직은 서울대학병원과 서울아산병원 두 군데에서 분석했고 똑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내시경 검사도 서울대병원 최재경 박사님께서 직접 오셔서 하셨습니다.”

대니얼은 이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꿈꾸어 왔던게 거의 다 이루어졌는데 암이라니. 대니얼은 머리를 쥐어 싸고 괴로워했다.

“당신, 내가 이혼서류에 도장 찍어줄 테니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줘요.”
대니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레이스 일주일만 여기 근처에 있는 요양소에서 함께 지내요. 마지막 소원이에요.”
“나 다음 주에 뉴욕가야 한다니깐.”
“지금 그 몸으로는 장거리 자동차도 못 타신다고 의사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대니얼은 아무래도 말린 야채와 생 곡식을 간 가루를 먹는 게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 물도 못 먹게 하니 뻑뻑한 입에 침이 나올 때까지 조금씩 천천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반 공기도 안 되는 가루를 먹는데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그의 아내와 딸은 아무 불평 없이 함께 생식을 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인터넷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니얼의 머릿속엔 뉴욕증시, 런던증시, 홍콩증시의 일주일전 지표들만 맴돌았다. IMF의 스페인구제책 발표가 나왔을 법도한데,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맨손체조하고 밥 먹고, 산책 나갔다가 밭에서 채소 따고, 밥 먹고 또 산책 나가고…

그런 생활을 한지 5일째, 이상하게 침이 점점 더 많이 나와서 생식가루가 달게 느껴진다. 살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난다. 그레이스는 얼굴에 났던 여드름이 많이 없어졌다며 좋아한다. 대니얼은 아내가 새벽마다 그의 머리맡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 모레면 아내와의 약속이 끝나고,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죽는다는데.

“띠릭띠릭”
뉴욕 본사 번호다.

“대니얼…축하하네. 이번에 자네 파트너로 재선출 되었네. 근데 몸은 좀 괜찮은 거야? 회복 되는 대로 홍콩사무실 인수인계해주고 빠른 시일 내에 뉴욕으로 오게나. 자세한건 자네 비서가 다 알려줄 거야.”
처음으로 그레이스 없이 아내와 둘이 산책을 나섰다.

“매앰 매앰 매앰”
처음에는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던 매미소리가 이제는 정겨운 리듬으로 들렸다.

“당신 왜 내가 암에 걸린 거 알고도 나를 찾아왔지. 이혼서류에 서명했으면 더러운 꼴 안 봐도 되잖아.” 대니얼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그레이스 때문인가?”
아내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이 계속 걷기만 했다.

“난…그냥 당신이 그렇게 분노에 쌓여서 사는 게 너무나 불쌍해서 내가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항상 출장 아니면 사무실에서만 살아서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죠. 차라리 당신이 암에 걸려서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어서…미안하지만 난 너무 행복해.” 아내는 말을 맺지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둘은 대니얼이 의식을 잃었던 집의 대문 앞까지 와있었다. 대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마당 그늘에는 각종 야채와 곡식이 널려 있다. 그리고 마루에 걸터앉은 고모할머니가 조그마한 절구에 무언가를 빻고 있다.

“이 눔아…철진아…들어와 보랑께”.
철진…까맣게 잊고 있었던 대니얼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빨랑 들어와 보랑께 뭐하고 있는 거여?”
아내는 언제 고모할머니와 친해졌는지 스스럼없이 마루로 올라가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 어깨를 주무른다.

“너가 너 샥시 때문에 산 것이여…”
“아니에요. 고모할머님께서 정성드레 빻아주신 생식덕택에…” 아내가 재빨리 가로챈다.
“창진 이 눔아...이 생식이 너거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농사지은 채소와 곡식으로 만든 거랑께. 너 이 눔 선산가서 할아버지께 감사하다고 하랑께.”

전에는 숨이 가빠서 오르지도 못했을 산길을 팍팍 소리를 내며 오른다. 10여분을 그렇게 오르자 산소가 보인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산소 옆에 잔디보다 흙이 더 많이 보이는 새 무덤이 할아버지인 듯싶다. 눈을 돌리는 순간 밑쪽으로 두 개의 산소가 더 보인다.

“흐흑…”
대니얼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이렇게 여기 다시 누워 있을 거면서 왜 떠났냐고요? 흐흑…”

대니얼의 아내가 그를 뒤에서 감싸 안는다.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손과 손이 하나가 되고 마음마저 가볍다. 두 팔을 흔들며 달음박질 쳐오는 그레이스의 함박웃음에 창진은 소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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