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적보다는 돈 되는 소나무에 관심 있는 듯

장호원 진암리 D아파트에 사는 이천향교 허섭 전교는 저녁 무렵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창밖을 내려다보다 깜짝 놀랐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어필각과 소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포크레인과 작업 인부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파트에서 내려다보고 출근을 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헐어지고 없네요. 집도 팔작지붕에 아담하고 예뻤는데 참 아쉽네요. 게다가 어필각 옆에 서 있던 소나무는 수령도 오래 되고 보기도 좋았는데 캐내가고 있네요.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도 가장자리에 있어 두고 보면 좋으련만. 사실 그동안 여러 차례 읍사무소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으니 보호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더 안타까워요.”

그러나 정작 놀란 사람들은 충주 석씨 종친들이었다. 본디 종친회 소유였던 어필각이 있던 진암리 땅 2만 여 평은 이미 이런 저런 경로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헐어버렸다는 사실에 분개한 석재인 씨는 공사를 맡고 있는 신진건설에 전화를 해봤다. 하지만 “뭐가 문제냐. 소유권은 1999년에 이미 넘어 왔는데 그동안 한번이라도 관리를 한 적이 있냐”는 핀잔만 듣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소유권도 1999년에 이미 넘어왔는데…”

이번에 헐린 어필각은 조선 태종이 화원(花園) 석여명(石汝明)에게 친필로 내린 교지를 판각하여 모셔 두었던 곳으로, 본래 진암1리 야산 중턱에 있었으나 수차례 중건을 하고 이전을 하면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이천시문화원과 강남대 인문과학연구소는 1999년 3월, 학술 조사를 통해 『문화 유적 구전 자료 보고서(장호원읍 편)』를 발간하면서 지역의 주요 문화재로 소개해 인근 학교에서는 현장 교육 장소로 활용해왔다고. 그러나 그 뒤 종친이나 이천시에서 보호나 관리 같은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지금에 이르게 됐다. 

현재 장호원읍 진암리 17-22번지 일원은 장호원 코아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어필각의 위치가 아파트 공사장과는 거리가 멀어 조경공사를 맡은 신진건설이 소나무를 캐가기 위해 어필각을 파손한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도 보내고 있다. 또 “이 지역 일대에서 캐가는 아름드리 조선 소나무의 양도 만만치 않은데 이들 모두 반출 허가를 받은 것인지도 알아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보호도 못할 문화 유적 조사는 왜 하는지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어필각이 어째서 지자체나 경기도로부터 아무런 보호 조치를 받지 못했는가에 있다. 물론 그 역사 문화적 가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순종 임금의 어필이 보존된 온양 이씨 어필각이나 헌종의 어필이 보존된 장포리 어필각의 경우 문화재 자료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는 것에 견주면 이천시의 문화재 관리 능력에 의구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2005년도에 김조순 묘비에 철종의 필체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경기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사례를 보면 충주 석씨도 어필각도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9년 조사 보고서에는 어필각의 관리자로 충주 석씨 화원공파로 적어 놓았다.                   

화원 석여명은 누구인가?

석여명은 조선 태종조의 문신으로 자는 윤립(胤立), 호는 화원(花園)이다. 본관은 충주. 조부는 태조 때 홍양부원군에 추봉된 양선(良善)이며, 조모 최씨는 태조의 이모이자 일찍 승하한 왕후를 대신해 태조에게 젖을 먹여 키운 경창옹주(京昌翁主)다. 석여명은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했으며, 고려 공민왕 때는 성균생원으로 주서(注書)의 관직에 올랐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벼슬을 버리고 절의를 지켰다. 이에 태종이 특별히 검교 한성윤 집현전제학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충주의 차의산 회문동에 살며 세상을 마쳤다. 태종이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양원섭 기자  won@2000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