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어렸을 때에 』에리히 케스트너 글 / 호르스트 렘케 그림 / 장영은 옮김 / 시공 주니어

너무 잘 파묻어서 다시 찾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면
행운의 동전처럼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기억도 있다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 할머니를 좋아한 이유 중의 하나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해 준 여러 이야기 가운데 재미났던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바로 ‘우리 아버지’의 어릴 적 일화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 시간은 오히려 할머니에게 더 즐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뭐라고 하던 본인에게는 사금파리 같이 빛나는 생의 한 조각이었을 테니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숨겨 둔 보물처럼, 너무 잘 파묻어서 나중에 다시 찾아 내지 못하는 기억도 있다. 그리고 행운의 동전처럼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기억도 있다. 그런 기억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가치가 있다. 그런 기억을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고도 비밀스럽게 보여 준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맙소사, 동전 하나 가지고! 그까짓 걸 소중히 간직하세요? 무엇하러 녹이 슨 동전 따위를 모으는 겁니까?”

케스트너가 이 책 맺음말에서 이렇게 쓴 것을 보더라도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마주 앉아 있는 자신의 어린 손녀에게 들려주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할머니가 내게 해 준 우리 아버지에 관한 일화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똑똑했던 큰아버지와는 달리 일본말을 못 익힌 어린 아버지 머리에는 일본선생에게 쥐어 박혀 밤송이만한 혹이 늘 나있었다던가, 보통학교에 갓 들어 간 아버지가 친구 따라 놀러갔다가 집을 못 찾아와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할머니가 말해 준 것이다.

케스트너는 1899년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내 어린 시절은 끝났다.” 이렇게 끝나고 있는『내가 어렸을 때는』 1957년, 작가 나이 58세에 쓴 책이다. 언젠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 역시 1899년에 태어났다. 3.1운동에 주동 학생으로 참가했던 이미륵은 중국을 거쳐 독일로 망명하여 뮌헨에 정착했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 두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공부하고 작품을 집필했던 곳은 둘 다 독일 뮌헨에서였다.

1946년에 발표하여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압록강은 흐른다』가 케스트너에게 구성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예를 들자면 책의 내용 중에 이미륵이 새로 부임해 오는 ‘관찰사 행렬’을 묘사했다면 케스트너는 ‘황제의 사열식’ 장면을 그리고 있다.

부유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미륵이 “동양인의 내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그리려 노력했다.”라고 한 반면 케스트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할 때에 다른 이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중략) 옛날 중국인들은 집 안에 사당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서로의 관계를 단단히 다졌다.(중략) 누구나 저 혼자 존재할 수는 없다. 또 어느 누구도 혼자 존재할 만큼 잘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못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엄숙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마음이 내키든 안 내키든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조상들을 위해서 사당을 짓는 대신에 조상 이야기를 아주 조금만 하려고 한다.”

케스트너는 수공업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조상들이 “지금의 내 직업에 몰두할 수 있는 꼼꼼한 성격을 물려주었다.”라고 하는데, 그가 가족들에게 비난 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해학적으로 쓰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태어났다고 말하는 케스트너는 “이것저것 곰곰이 따져 보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참 섭섭할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어떻게 자라나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케스트너의 해학이 넘쳐나는 이 책 한 권이 오랫동안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독자들은 얼마나 흥미를 느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