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기 시인

식당이나 찻집에 들어가서 본 벽걸이 액자 중에 ‘처음처럼’이라는 글귀처럼 내 마음을 움직인 글은 많지 않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이 짐작되는 간단한 구절이지만, 이 말에는, 에머슨의 표현을 빌면, 설교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 텅 빈 교회당에서 맛보는 그런 경건함과 엄숙함이 있다.

  교회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지만, 이 ‘처음’이란 말은 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 창조를 알리는 태초가 바로 그 ‘처음’이요, 또 <계시록>에는 ‘처음의 사랑’을 버렸음을 책망하고 회개하여 ‘처음의 행위’를 간직하라고 쓰여 있다. <창세기>의 ‘처음’이 창조의 질서와 축복을 말한다면, <계시록>의 ‘처음의 사랑’은 그 질서와 축복 순간을 잊지말라는 가르침이리라.

  몇 해 전에 별세한 동화작가 정채봉의 옷걸이에 관한 우화는 ‘처음’을 좀더 세속으로 끌어내려 많은 이들에게 대중적인 재미를 준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말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라.”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죠?” “잠깐씩 입혀지는 옷들이 자기의 신분인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신분이라는 표현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동양학에서 말하는 분수(分數)로 이해하면 그럭저럭 보아 넘길만하다.

  ‘처음’에 관해 좀 깊이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사실 잠바티스타 비코다. 비코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수사학자다. 그의 존재는 객관과 보편을 중시한 프랑스나 독일의 서구 사상가들과 달리 나폴리 출신이란 점에서 돋보인다. 서구의 사상가들과 달리 유럽 남구의 사상가들은 조화를 강조하고, 상대적이며, 훨씬 더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 노력의 연장선에 여성 운동, 자유 교육, 문화 상대주의, 생태 환경 운동 같은 사상적 움직임을 상정해 놓을 수 있다.

  그는 역사란 그것이 시작된  ‘처음’에서 가장 이성적이며, 보편적으로 이해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 ‘처음’이란 알고 보면 대개 시시하기 때문에 현재의 권력이나 억압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의 섭리를 찬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시작’이 신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이드의 해석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새 시장이 취임하고, 의회도 새로 출발했다.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비코의 말이 이제 막 첫 단추를 끼는 모든 분들에게 관습과 획일화, 지역주의라는 환상을 이성으로 깨뜨리는 경구로 들리기를 진정으로 희망한다.

이창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