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익 재경이천시민회 회장

프랑스 북부, 영국의 도버해협과 맞닿아 있는 곳에 ‘칼레’라는 도시가 있다.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탄생된 곳이며 ‘칼레’는 곧 ‘구성원들이 각자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사회’를 상징한다.

칼레의 시민들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중 영국에 맞서 1년 가까이 저항했고, 1347년에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당연히 영국에 저항했던 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때 시장을 비롯한 칼레의 지도층 인사 6명이 나서서 자신들을 처형하고, 대신 무고한 시민들은 살려달라며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영국국왕 앞으로 죽음의 길을 자원했다. 칼레시가 처한 위기는 곧 지도층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란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러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 국왕은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자신에게 저항했던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사면했다. 결국, 지도층의 용기와 희생이 칼레시민들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옛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진해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으로 16년간 이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에 귀족을 대표하는 최고위 관리인 집정관이 13명이나 전사했다고 하며 당시 로마에서는 병역의무를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집정관이나 호민관 등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이르는 말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로마 귀족들에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한다는 신념으로 그들은 자신이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근대 유럽의 전장에서도 적진에 솔선수범 뛰어들어 전사한 장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귀족가문의 자제였다고 한다. 영국에서도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왕족과 귀족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던 명문 이튼 칼리지에서 2,000여명이 참전하여 전사하였고 여왕의 부군과 아들들도 전쟁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징병제 국가가 아닌 모병제 국가에서 고귀한 신분의 로열패밀리가 군복무를 하는 모습은 자연스런 미덕이고 상식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도 우리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고사하고 국민의 의무마저 외면하는 모습들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특권과 권력을 향유하면 그에 따르는 의무와 희생도 감수하는 상식이 필요하다.

얼마 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손녀이자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둘째 딸이 해군 사관후보생에 최종 합격함으로 재벌가 출신 첫 여성 해군 장교가 탄생했다는 신선한 뉴스를 접하고 젊은 친구의 멋진 선택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재벌가의 자녀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으련만 주어진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벌고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했을 정도로 자립심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해군장교에 지원 남자들도 기피하는 함정 승선근무를 자원했다고 하니 그저 대단할 따름이며 주어진 복무기간동안 열심히 복무하여,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병역을 면제 받으려 애쓰고 실제로는 많은 자녀들이 병역을 면제받고 있는 수많은 재벌가의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그동안 ‘재벌가들의 자녀는 군 면제’라는 공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여자의 몸으로 이러한 통념을 깨트린 결정에 큰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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