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환 극동대학교 겸임교수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불렀죠. 「나 가거든」. 여기서 ‘나’는 명성황후지요.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 난 슬퍼도 살아야 하는..." 애절한 음색에 멜로디가 한국인 가슴 적시는데요... 특히 우리 여주이천 사람들은 각별하죠. 명성황후가 여주를 관향으로 하는 여흥 민씨에다 생가가 여주읍 능현리잖아요. 제가 기자시절이던 1990년대 초반 체계적인 생가 복원이 필요하다는 TV 뉴스를 만든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성역화 사업이 잘 진행 돼 명성황후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무게 만큼의 위용을 갖췄답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 문화특보로 내정된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명성황후와 우리 이천여주 주민들 가슴에 못을 박는 치욕적인 말을 했더군요. 60평생 탤런트로 잔뼈가 굵은 분이 펼친 연기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못된 강연의 내막을 볼까요. 1)강연 무대:서울 우면동 소방학교. 2)강연 제목:‘문화예술이 대한민국의 경쟁력’. 3)관객+시청자:강남소방서 직원과 의용소방대원 4백명+전국민 4)문제의 멘트:“경복궁... 궁궐 담장을 보세요. 얼마나 인간적이에요? 사람들이 홀랑 넘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민비가 시해를 당한 것 아닙니까?”(경향신문 7월 23일자). 우선, 명성황후라는 말을 두고 민비라는 표현을 쓴 것도 못마땅하지만, 궁궐 담장이 낮아 명성황후가 시해됐다니... 그릇된 역사인식에 놀란 입을 다물기 어려워요. 명성황후 시해는 일제가 조선병합을 위해 벌인 치밀한 국권침탈의 만행, 5천년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죠. 끔찍하지만, 유 전장관의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고, 우리 여주이천 사람들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잠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894년 7월. 동학농민혁명을 짓밟은 일제가 청일전쟁 마저 승리해 중국진출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중국을 뜯어 먹으려 달려들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일본견제를 위해 청나라한테 빼앗은 요동반도를 돌려주게 만듭니다. 이를 [3국간섭]이라고 하죠. 일본이 굴복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의 조선침탈에 제동을 겁니다. 친러파 이범진 등을 기용하는 동시에 여주목사 출신으로 훗날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가진 등은 친일세력으로 몰아 면직시키지요. 명성황후의 탈 일본정책이 가속화되자, 일제는 육군중장 출신 과격파 미우라를 조선공사로 파견해요. 이토 히로부미가 장악하고 있던 일본조정과 미우라는 조선장악을 위한 유일한 길이 명성황후 시해라고 결론 내립니다.

미우라는 명성황후와 갈등하던 76살의 권력 화신이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물론 궁궐경비 조선군 1, 2, 3 대대장 이두황, 우범선, 이진호를 포섭합니다. 미우라 부임 한 달 만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마침내 일제군 호위 속에 니뽄도를 찬 일제 낭인들이 흥선대원군 등 포섭된 조선인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진격합니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조선군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에서 살해돼요. 일본군 총격에 조선 군사들이 달아나고, 무장해제된 경복궁은 이들 손아귀에 놓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인 경복궁내 건청궁(乾淸宮)으로 난입한 일제. 명성황후 침소인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에서 세계사 유래가 없는 참극이 펼쳐지죠. 고종과 왕세자(순종)는 옷을 찢기고... 세자는 상투를 잡힌 채 칼등에 맞아 기절하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필사적으로 옥호루를 지키다 쓰러지고... 명성황후와 비슷하게 생긴 궁녀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되고... 마침내 명성황후 마저 칼로 난자 당합니다. 시신은 근처 숲 녹산으로 옮겨져요. 일제는 석유를 끼얹어 불태웁니다. 검은 연기를 토해낸 왕비는 재로 변해 산에 묻혀요. 다음날 고종을 만난 미우라는 “왕비가 궁궐을 탈출해 폐비시킨다”는 조칙을 내리게 합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일이 아니지요. 이상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 야욕이 빚어낸 을미사변의 전말이에요. 우발적인 담장 타넘기가 아니랍니다. 사실 조선의 국권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사라진 거죠.

처음 일본은 대원군이 길을 열고 조선병사가 앞장선 조선 내부 문제라고 항변하죠. 하지만, 국제사회 분노가 거세지자 마지못해 미우라 공사 등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가둬요. 물론 2달 만에 전원 석방하지요. 모두 영웅대접을 받고, 미우라는 천황으로부터 '노고' 치하까지 받습니다. 왕비 시해에 가담한 훈련대 1, 2, 3, 대대장인 이두황, 우범선,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해요. 호화판 생활 끝에 귀국해 일제시대 총독부 고위관직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후 묘소도 잘 꾸몄답니다. 우범선만 1903년 암살돼요. 그와 일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우장춘입니다. 씨없는 수박을 발명했다고 잘못 알려진 인물인데요. 일본정부 후원으로 공부한 우장춘은 1949년 이승만 정부의 청으로 귀국합니다. 2003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른 그의 묘소는 수원 농업진흥청에 잘 모셔져 있답니다. 이게 대한민국 현주소예요. 이런 나라이다 보니 문화부 장관 출신이 명성황후 시해원인을 경복궁 담장이 낮은데서 찾는 반문화, 반역사, 반민족적 망언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세상이 된 겁니다.

유인촌 전 장관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든 남양주의 홍릉에 가서 참회하고, 여주 명성황후 성역지로 와서 명성황후와 여주이천 주민들에게 백배사죄해야 합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제의 잔인한 만행에 희생된 명성황후의 넋과 상처 입은 이천여주 주민들을 위로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대통령 문화특보로서 최소한의 문화적 소양을 갖췄다면 말입니다.

 

 

이천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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