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의 신랑입장, 신부입장 외침이 엊그제 같고, 신혼여행 다녀 온 지도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결혼식 비디오는 어디 갔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결혼 한 지도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유치원 송년 음악회에 와 달라고 보채던 아들 녀석은 슬쩍슬쩍 내 옷을 가져다 입기 시작했고, 기저귀 갈아주던 딸애는 옷 갈아 입어야 되니 자기 방에서 나가 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이렇게 애들을 부모간섭 받길 싫어할 정도로 키워 놨으니 여유가 생길만도 한데, 여전히 아내는 바쁜 것 같다.

애들이 자기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빡빡 기어오른다고,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한다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나를 붙잡고는 한 동안 툴툴 거리더니... 언젠가부터 퇴근해서 집에 와도 눈길 한번 안주고 말없이 멍한 표정만 짓고는 계속 잠만 자는 것이었다. 무심한 남편이었던 나는 1주일쯤 지나서야 아내가 정말이지 아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어디가 아프냐고, 병원에 가자고 큰 소리까지 내길 했었다. 이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도 한참이나 걸렸으니 0점짜리 남편이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밥 먹다가도 가끔은 아내를 한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곤 한다. 그럴때면 어쩐 일이냐며, 늙어가는 판에 뭐 쳐다볼게 있냐며 곱게 눈을 흘기는 아내를 보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아내의 존재에 대해 나와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왜 이제 사 드는지 미안한 마음과 묵묵히 애 낳고 가족모두 건강하게 살아왔던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앞으로도 애들 시집, 장가보내고 죽을 때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데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최근에는 은퇴라는 현실적인 고민과 겹치면서 “나중에 아내가 나와 놀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며 지레 겁을 먹고 지금부터라도 잘 하리라는 결심으로 아내에게 하지 않던 농담도 걸어 본다. 지금부터라도 나중에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든 취미든 배우러 다녀야겠다는 계획을 함께 세우고 있고, 아내가 건강해야 여행도 함께 다니고, 같이 놀아줄 수 있을 것 같아 지난 봄에는 아내 명의로 실손보상 의료보험도 하나 가입해 두었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즉 내가 아내보다 먼저 죽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현실에게 깨닫기 전 까지는 말이다.

‘아, 그렇지!, 내가 아내 보다 먼저 가는 거였어!’ 난 참 이기적이었고 자기중심적인 남자였단 생각이 든다. 부부가 일평생을 함께 살다가 먼저 가는 사람은 혼자 남겨진 배우자가 짊어 져야 할 외로움, 슬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적 부담에 비하면 오히려 홀가분할 지도 모르겠다. 홀로 남겨진 아내의 외로움과 슬픔은 먼저 가는 남편인 내가 책임질 수 없지만 적어도 죽어서 내 곁으로 올 때까지 돈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일은 없도록 만드는 것은 당연히 남편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국가도, 자식도, 사랑하는 나의 아내를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아내를 책임져 줄 수 있는 든든한 남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아내를 연금과 결혼시켰다. 딸애를 결혼 시키는 날,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죽더라도 연금이 나를 대신해서 당신 죽을 때까지 적어도 돈 문제에서는 든든한 남편 구실을 할거야...’라고 말이다.
이천저널  icjn@par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