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상환 이천저널 회장

대략 70~80대에 걸친 노년층은 우리나라의 6.25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거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살아온 세대들이다. 변변히 읽을거리 책도 없고 입에 풀칠하기 바빠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도 힘들었던 세대들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6.25 전란동안 시골로 피난을 갔을 때 그 당시 중학생 신분이었다. 읽을거리라고는 변변한 것 없고 마침 우연찮게 피난처에서 나관중 저「삼국지연의」원본을 구하게 되어 시도 때도 없이 그것만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다. 같은 구절도 세월에 따라서, 또 한시도 처음에는 삭막하던 것이 차츰 의미와 맛이 전달되고 한문이 주는 축약의 힘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누구나 다 알고 우리 삶의 어느 한 면을 지배하는 것처럼 삼국지는 많은 장한 모습들이 있다.

아름다운 수염을 휘날리며 고리눈 부릅뜨고 82근 청령도 휘두르며 적토마 휘몰아 단칼에 화북명장 안량, 문추를 벤 관운장의 호쾌한 모습은 동양인 전체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한 바 있다. 또 있다. 고슴도치 수염을 곧추세우고 장팔사모 꼬나 잡고 장판교에서 대갈일성 소리치던, 그래서 말 탄 적장이 우레 소리 같은 큰 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고사를 가지고 있는 장비의 용력, 또 백만진중을 장창을 꼬나 잡고 아두를 품에 안고 마치 무인지경 달리듯 종횡무진 누비는 것을 보고 단상에 있던 조조가 탄식을 한다.

“저 장수는 누구인가?”
“유비 휘하의 상산 조자룡이라고 하옵니다.”
“장하다. 진실로 장하다. 萬夫不當之勇을 갖고 있는 장군이로다. 철궁을 쓰면 다칠 터이니 생포하여 내 계하에 데려오도록 하라.”

탄식을 마지않았던 상산 조자룡, 전장을 누비던 오호장군 중 드물게 자연수명을 다한 인물이다.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치고 감동을 자아내며 백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삼국지의 묘미다.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듯이 핵심중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하더라도 적벽대전을 일컫는 것이 정도일 듯하다.

대대로 명문세가로 세력을 떨치고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원소의 세력을 꺾고 화북을 장악하고 해상의 요지인 형주를 장악한 조조가 호왈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황제의 위엄을 등에 업고 천하통일을 도모하려 손권 장악 하에 있는 오나라를 도모할 때 대부분의 세력들은 조조대군의 위세에 눌려 강동6주 중 일부를 떼어주고 항복을 하자고 권유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장군 주유가 나서서 이에 대항하고 조조, 도적을 칠 것을 주장하고 여기에 세가 밀려있었으나 유비의 제갈, 관우, 장비 등 오호장군도 같이 합세하게 된다.

그러나 고민이 없을 수가 없다. 공명과 주유는 서로 손바닥에 조조의 대군을 격파할 묘책을 한자씩 적어서 맞춰보기로 하고 뒤돌아선다. 마침내 글자를 다 쓴 후 뒤돌아서며 손을 펼치니 ‘火’ 한 자로 일치했다. 즉 화공으로 장강을 뒤덮어 내려오는 조조의 수군을 격파하자는데 의견의 합치가 되었다. 그 후 청년대도독 주유는 칭병을 하고 군무에 나오질 않는다. 일이 이러하매 격려차 병문안을 왔던 공명이 편지 하나를 놓고 간다. 살펴보니 ‘東南風’ 세 글자다. 화공의 방법 이외에는 조조의 백만대군을 격파할 길이 없음을 통찰했으나 겨울철이라 서북풍이 불 뿐 동남풍이 없으면 오히려 아군의 전세가 더 불리해질 것인 만큼 고민의 고민을 하다 칭병을 하게 된 것이다. 공명을 불러 의견을 나눈다.

“공명선생은 무슨 묘책이 있으시오?”
“시생이 큰 재주는 없으나 약간의 둔갑술을 익힌 바가 있고, 천문을 공부한 바가 있어서 단을 모아주면 공격의 날에 맞추어서 하늘에 빌어서 동남풍을 일게 하겠나이다.”
“군중에 허언이 없으니 목을 내 놓겠는가?”
“다짐을 하리다”

반신반의 하면서 칠성단을 모아놓고 동남풍이 불 것을 공명에게 부탁하고 온 병력을 장강에 대비시켜 방통으로 하여금 연환계를 쓰게 하여 조조진형에서는 쇠줄로 전부 묶어 그 위에 널판을 까니 마치 장강에 흔들리던 배들이 육지처럼 평온하여 기마가 운신하기가 평지나 다름없다. 쾌재를 불렀다. 순욱이 아뢴다.

“승상. 만약에 적이 화공이라도 쓰면 철책으로 묶어 논 배들이 피할 길도 없고 고스란히 화공을 당할 터인데 어찌하오리까?”

“나의 책사인 그대가 그 정도도 모르는가? 나도 그 위험을 어찌 모를 것인가. 지금은 겨울이다. 서북풍이 불 뿐 동남풍은 있을 수가 없다. 동남풍이 있어야만 그런 위험이 비롯되는데 지금 서북풍 계절에 당치도 않다.”

순욱이 달리 간하지 못하고 물러선다.

마침내 약속일 약속시에 칠성단에 단을 쌓고 하늘에 빌던 공명이 제를 마치니 동남풍이 일기 시작한다. 강한 동남풍에 맞춰서 화공을 쓰게 되니 조조의 백만대군은 바다 같은 장강 위에서 어육이 되고 그 불길을 피할 길이 없게 되고 풍비박산 하였다.

대승중의 대승을 거두었고 이것이 마침내 위, 오, 촉 삼분지계가 달성되고 천하가 평화를 찾아 새 역사를 쌓아가기 시작하던 모멘텀이었다.

가만히 주유가 생각한다. ‘제갈량이 바람을 일구고 구름을 이끌어내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수를 가졌으니 오나라로서는 큰 재앙이로다.’ 여러 차례 기이한 책략을 써서 제갈량을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이 먼저 알아채고 도망가고 말았다. 천하대도독으로 절륜한 무예와 뛰어난 용모, 비할 수 없이 준수한 몸차림, 학문, 거기에 천하제일의 미녀 소교를 부인으로 얻어서 더할 수 없는 복락을 누리는 대장군 주유였다. 그만큼 잘 다듬어진 청년장군이 어디에 있었던가? 손권의 절대 신임을 받고, 오나라를 건져냈고, 그 영광이 온 천하를 뒤덮는구나. 그럼에도 아무리해도 제갈량을 따르지 못하게 되니 마침내 병석에 들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탄식을 했던 구절이다.

“하늘이시어, 어찌하여 이미 주유를 내시고 또 제갈공명을 내셨나이까?”

피를 토하는 탄식의 소리를 가슴이 미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삼국지 전편에서 가장 처절하고 울림이 큰 구절이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유사한 케이스를 더러 보았다.

원균의 모함에 걸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선조의 화를 돋우어 거북선 전체를 잃게 되고 패전을 하여 백의종군하던 순신에게 그 상중인 어머님 상가를 지나면서도 백의종군 군졸의 신분인지라 상례도 못 치르고 전선으로 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중일기 전편을 보면 어디 한 구절 임금을 원망하거나 주변을 탓하는 바가 없다. 마침내 선조가 다시 복권하도록 조치하고 해상에서의 해전이 불가능할 것을 알고 남은 병졸 이끌고 권율 휘하에서 육전 하도록 하명을 한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글을 남긴 고사가 있다.

‘微臣不死 尙有十二’ 어리석은 신하(순신을 말함)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 작정을 한 듯한 비장함이 그대로 스며든다. 23전 23승을 일으키고 이 나라를 구했던 순신의 처절함이 微臣不死 尙有十二 라는 글자에 그대로 스며들고 우리 후손들의 가슴을 치게 한다.

기독교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우리의 가슴을 치는 구절이 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같으리라고 본다.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마침내 예수가 외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버지시여. 하늘아버지시여 어이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물려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통절하게 외쳐 마지않는 그 모습을 그려보면 울지 않고는 볼 수가 없구나. 80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처절하게 언제고 가슴을 울먹이며 보고 또 봐왔던 구절들이다.

요즘 수능시험이 끝났다. 젊은 병아리들이 새 세상, 새 학교에 진학하느라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대학 관문을 뚫으려고 애쓰는구나. 소원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관문을 뚫은 기쁨의 학생들의 성취에 대해서 크게 격려해 마지않는다.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몇 갑절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여 물러서고 방황의 길을 걷게 될 때에 그 아픈 심정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또 사랑하는 여인과 순탄하게 짝이 이루어졌으면 더없이 좋겠으나 우여곡절 끝에 헤어지게 되어 쓰린 가슴 부여 않고 지옥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 사람들, 또 목표했던 것이 좌절되어 인생을 방황하는 사람들, 모두가 보기가 딱하고 안쓰럽구나. 그래서 인생사에는 구부득고(求不得苦)라고 하였다. 구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으련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것에 대비해서 옛사람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반짝반짝 빛이 나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출세가도를 달리면 얼마나 좋겠나마는 타고난 복력이 그렇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매사에 일등을 하려고 애쓸 때에는 일등은 하나밖에 없고 좌절과 처절한 실패 속에서 허망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옛날 과거제도가 있을 때 모든 것을 과거에 매달려 젊은 청춘을 다 보내고 달성이 안됐을 때에는 좌절 낙담하여 시골의 글방 선생으로 한 생애를 한탄과 비애 속에서 생을 거두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렇지 않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어떤 기업인이 외쳤다. 세상에 필요한 인재는 일등짜리가 아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믿어도 좋은 친구, 성실하여 그 성실함이 겉으로 묻어나 우직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인재들이다.

중용에서도 얘기했다. 재상위불능하(在上位不陵下)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을 능멸해서는 안 된다. 재하위불원상(在下位不援上) 아래 있는 사람은 없는 자리에서 윗사람을 깔쭉깔쭉 긁는 버릇은 없어야 한다. 성실하여 그 성실함이 스며들어 겉으로 나타날 정도로 그런 인물, 남에 대한 배려를 하는 인물, 낮은 데로 임하는 인물, 성경에서도 그랬다. 지도자는 남의 윗자리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해서 남을 돕는 사람이 우뚝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여 일등을 찾을 때에는 살벌한 사회밖에는 될 수 없으나, 각자의 최선을 다한 정도로 머무르고, 오히려 정직에 힘쓰고, 성실에 힘쓰고, 신의에 힘쓰고, 청결에 힘쓰고, 남에 대한 배려에 힘쓰는 그런 인물이 직장에서는 더 필요하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청춘의 길에서 후자의 길을 밟으면 친구를 사귈 수가 있고, 더불어 사귈 수가 있고, 동지를 구할 수가 있고, 폭넓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고,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기쁨을 돌릴 수가 있는 원만한 인격이 조성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수능시험을 보느라고 수고들 하고 손을 호호불고 삼삼오오 짝지어 헤어지는 후손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궁한 장래가 있기를 기원 드리고 떨어져 가슴앓이 할 많은 후학들이 안쓰러워서 다소나마 위로가 될까하여 한마디 걸쳐보았다. 여러분들의 분발과 격려를 드린다.

결국은 나라를 이끌어갈 주인은 여러분들이다. 좌절과 실의 속에서는 아무런 창의도 나오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고 지성과 야성을 곁들이는 우뚝한 인재들이 되기를 당부해 마지않는다.

그리고 이미 지도계층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솔선수범 「희생」이 필요하다.

첫째, 목숨 바치는 희생이다. 전쟁이 나면 앞장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논어에 나오는 見利思義 見危授命이다. 卽 위험에 당면하면 네 목숨을 먼저 내어 놓으라.

둘째, 기득권을 미련 없이 먼저 내려놓으라.

셋째, 배려와 양보, 헌신이다. 이러한 지도층이 많으면 나라는 융성 발전한다. 이러한 사례를 영국과 과거 우리의 신라의 지도층에서 보아왔다. 모두 힘을 합하여 다시 한 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나라를 만들자.

이천저널  icjn2580@hanmail.net